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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 때마다 만개한 벚꽃 잎이 흩날렸다. 막 중간고사가 끝난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봄을 만끽했고 연인들은 꽃이 흐드러진 도심 곳곳에서 사랑을 키웠다. 가장 활기차고 한편으로는 나른한 봄기운에 춘곤증이 도지는 계절이었지만 돌연히 찾아온 괴인재해에 S시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코끼리가 의인화 된 듯한 모습의 괴인은 고작 5m에 불과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거대한 크기에 압도되어 공포에 질렸겠지만 파괴력에 대해서는 도시 하나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인류를 위협했던 두 괴인이 모두 평범한 인간형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안일한 착각이었다. 그 괴인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순식간에 S시의 4분의 1이 파괴되었다.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살아남은 이들은 타인의 죽음에 슬퍼할 여유도 없이 절망에 빠졌다. 뿌리 채 뽑힌 벚나무에서 흩어진 벚꽃 잎이 하늘을 수놓았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그러나 지상은 생지옥과 다름없었다.
이 파괴의 끝에는 코끼리 괴인에게 굴복하는 인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은 지옥이 끝났다. 그 괴인을 막은 것은 S급 히어로인 금속배트였다. 꽤나 힘든 상대였다. 귀급 개체를 동시에 두 마리나 상대했던 금속배트가 고전할 정도였으니 코끼리 괴인이 귀급이라는 판정은 잘못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코끼리 괴인을 만나기 전에 다른 괴인을 상대해서인지 꽤나 지쳤던 금속배트는 그 괴인을 힘겹게 이겼고, 평화를 되찾은 후에 곧바로 쓰러졌다.
“오빠….”
젠코가 병실침대에 누워있는 금속배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한 금속배트는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지만 따뜻한 온기가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젠코는 금속배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마에 두른 붕대와 얼굴 여기저기 붙어있는 밴드. 팔에 두른 깁스와 온몸의 타박상, 자상, 자잘한 찰과상까지. 병원에서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라고 말했다. 금속배트가 히어로를 시작한 이후 종종 들어온 말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문장은 언젠나 젠코의 작은 심장을 가쁘게 뛰게 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젠코가 히어로 활동을 반대하지 않은 이유는 오빠의 힘을 믿고 있어서였다. 아직 어려서 자신의 오빠가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거대한 지네가 나타났을 때를 비롯하여 벌써 두 번이나 이런 꼴이 되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족이라고는 서로 뿐인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나 집에 가서 책가방 가져올게.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학교 가려고.”
병원과 집은 멀지 않았고 12살이나 되었으니 병원에서 등교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젠코는 금속배트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준 후 병실을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금속배트의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올 때에도 울지 않았는데 병실 문을 닫으니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바보 같은 오빠. 히어로 활동을 하는 건 다 좋으니 제발 몸을 사렸으면 좋겠다. 젠코는 몇 달 전 괴인한테 습격당한 날을 떠올렸다. 가로우가 오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던 그 날. 금속배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에게 달려왔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무사한 자신의 동생을 보자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피가 흘러내리는 목과 온몸에 난 작은 생채기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혔다. 생명이 위급한 상처도 아니었는데 혈안이 되어 동생을 상처 입힌 괴인을 찾아내려는 것을 겨우 말렸다. 이름 모를 히어로가 도와 줬다고 거짓말을 했다. 도와준 당사자가 들으면 질겁할 소리지만 젠코와 타레오에게는 히어로나 마찬가지였다.
“흐읍…끅, 흐윽….”
동생의 상처에는 그렇게 분노하면서 자신의 몸을 왜 돌보지 않는지 모르겠다. 동생을 생각한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젠코는 병실 앞 의자에 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가 우는 모습에 간호사와 지나가는 어른들이 다가왔지만 젠코는 괜찮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피했다. 금속배트를 쩔쩔매게 하기 위해 운적은 있지만 아프거나 슬퍼서 운적은 어렸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젠코는 화장실로 들어가 코를 풀고 세수를 했다. 창피하니 저절로 눈물이 그쳤다. 젠코가 눈을 비비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키가 작아 가슴께까지만 비추어졌다. 거울 속의 자신은 눈이 빨갛게 부은 것을 빼고는 멀쩡했다. 어차피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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